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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25] (경향신문) [미투의 혁명, 혁명의 미투](4)성추행 고발서 남과 여 일상화된 모순 흔드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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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세연 작성일18-05-15 16:07 조회1,1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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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미투는 혁명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정혜원씨(30·가명)는 어린 시절부터 밥상머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정씨 아버지는 1980년대 초반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이 활기차고 역동적이던 시기에 대학생활을 했고 1987년 6월항쟁 때는 ‘넥타이 부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밥상머리 의제는 다양했다. 군사정권 잔당에 대한 분노, 부당한 지역차별, 반미와 평화. 집에는 늘 책과 시사주간지와 신문이 굴러다녔다.

 onebyone.gif?action_id=477a1d70d32b81b81아버지는 시민단체 몇 군데에 꼬박꼬박 후원을 했고, 명절이면 친척들과 둘러앉아 정부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투표를 어디에 해야 하는지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곤 했다.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는 집안에 없다’고 정씨는 늘 느꼈다. 아버지는 중견기업에 다녔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는 신문을 들고 와 책상에 앉았고, 어머니는 갓 짠 녹즙을 식탁에 올려놓은 뒤 아침을 준비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머니는 퇴근하자마자 분주하게 정씨와 두 살 아래 동생을 챙기고 밥을 차렸다. 아버지가 청소기를 돌리거나 사소한 집안일이라도 돕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아버지의 일, 어머니의 일 

어머니가 없으면 부엌일은 큰딸인 정씨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아이가 아프다”며 늦게 출근하거나 업무를 마무리하지 않고 일찍 퇴근하는 여직원들에 대해 “책임감이 없다”고 험담하면서 어머니가 차린 밥을 먹었다. 그러나 가구를 어디에 둘 것인지, 여름휴가를 어디로 갈 것인지부터 정씨가 진학할 학교와 학과까지 집안 대소사를 결정하는 것은 늘 아버지였다.

아버지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더 자라서 알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 일제와 독재정권의 만행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국사 선생님은 명절을 지내고 돌아온 어느 날 “왜 여자들은 제사가 힘들다고 난리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몇몇 여학생이 손을 들고 가사노동을 여자만 하는 것은 성차별이 아니냐고 따졌지만 선생님은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했다. 재벌을 비판하고 경제적 양극화가 문제라고 이야기하던 경제 선생님이 여학생들의 엉덩이를 더듬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총여학생회가 실시한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았다. 그날 저녁 술자리에서 한 남자 선배는 “저런 걸 다 성폭력이라고 하면 단체생활을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그해 열린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 그 남자 선배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간 사진들로 도배됐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의 애청자가 됐다. 수감된 정봉주 전 의원에게 ‘비키니 응원 사진’을 보내라는 말에 화가 나서 “우리는 진보의 치어리더가 아니다”라는 글을 트위터에 공유했다가 다른 누리꾼들과 싸웠다. ‘거악’에 맞서 싸우는 <나꼼수> 멤버들을 왜 그런 사소한 일로 공격하느냐, 선거가 다가오니 일단 선거에서 이기고 여성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댓글이 쏟아졌다. 

한국 사회에 정치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자리 잡았고 인권과 평등이라는 가치도 제법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성평등 문제는 늘 부차적이거나 당장 시급하지 않은 문제로 여겨져왔다. 민주주의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인권과 평등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성평등 혹은 여성과 관련된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면 되는 일’로 치부됐다. 2002년 개혁당 성폭력 사건 때, 지금은 전업작가 겸 방송인이 된 한 정치인은 “해일이 일어났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가 성차별 문제를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정치적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제 몫의 권리를 동등하게 누리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에게는 ‘민주화 혁명’을 넘어선 또 다른 ‘일상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근래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미투 운동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성폭력과 그 밑에 깔린 성차별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사건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완성된다고 집단으로 목소리를 낸 것이다. 

■ 촛불, 그리고 미투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상임대표는 “계급갈등과 사회양극화 같은 문제는 ‘흙수저론’ 등의 담론으로 대중적 공감대를 얻었고, 양극화를 극복해야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는 사회적 합의도 형성됐다”며 “하지만 저출산이나 여성 노동력 미활용, 성별 임금격차 같은 구체적인 현상으로 이미 성차별 구조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사회의 인식 수준은 여전히 매우 낮다”고 말한다.

가부장적인 성차별 구조의 문제는 미투 운동을 통해 폭발력 있는 이슈가 됐다. 유명 문인과 연극인, 유력 정치인, 인기 절정을 달리던 방송인들이 피해자의 고백에 하루아침에 사회적 생명력을 잃었다. 피해자들이 고발하는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단과 연극계의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이 ‘여성의 이해관계를 쥐고 있는 남성 권력자’임을 명시했다. 남성 교수가 여학생들을, 남성 정치인이 여성 비서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사건 등이 잇따라 폭로되면서 힘 가진 남성과 상대적 약자인 여성 사이의 문제라는 유형이 그대로 드러났다. 

피해자들의 고발과 증언은 성차별과 성폭력이 괴물 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에게 권력과 지위가 쏠린 성차별적 구조에 있음을 보여줬다. 이달 초 열린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 참가자들은 “미투가 바꿀 세상, 우리가 만들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미투 운동이 성차별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서 체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성 권력에 도전하고 위계구조를 뒤집으려 한다는 점에서 미투는 ‘혁명’이다. 

‘미투 혁명’ 이전에 2016년의 촛불혁명이 있었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두 현상은 연관된 맥락에서 봐야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10년 가까이 거치며 쌓여온 정치적 불만들은 촛불을 들어 정권을 바꾸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소됐고 모든 분야에서 ‘적폐청산’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성폭력에 반대하고 범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큰 차이가 없지만, 미투 운동의 파급력은 어느 때보다 컸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뤄낸 시민들이 일상의 모순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윤옥 대표는 “촛불혁명 직후 미투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87년 직선제 개헌 투쟁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민주화운동에 가장 열심히 참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찾지 못한 이들이 전국적 파업투쟁에 나섰듯, 촛불혁명에 적극 참여한 여성들이 ‘촛불이 해소하지 못한’ 성차별을 고발하고 나섰다는 뜻이다. 

민주주의가 진전을 이루면서 부당한 권력관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이 줄고 있다고들 여겼으나 성차별이라는 최후의 불균형한 권력관계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이기도 하다.

박봉정숙 한국여성단체연합 성평등연구소장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살아나고 있는 과정에서, 여기에 동참한 여성들이 차별을 발견하고 ‘동료시민’의 위치를 보장받기 위해 나선 것”이라며 “성차별적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크게 들릴 수 있도록 만든 시대의 변화도 이를 추동했다”고 말했다. 

성차별적인 법률·학교 교육에도 ‘#미투’를 날려라 

■ 미투에 응답, ‘이제 시작’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휩쓴 미투 혁명의 결과는 제도와 일상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성폭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성폭력과 성차별적 구조가 은폐돼온 이유는 가해자는 권력을 가졌고, 피해자는 침묵을 강요당해왔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 후 성폭력이 ‘피해자가 처신을 잘못한 것’이 아닌 ‘국가가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로 부상했고 피해자들이 ‘말할 용기’를 낼 수 있게 됐다. 올 1분기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여성긴급전화1366에 접수된 성폭력 상담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1%나 늘었다. 해바라기센터와 여성가족부 성희롱·성폭력 특별신고센터, 고용노동부, 교육부 등에서 운영하는 신고센터 접수건을 포함하면 2018년 들어 석 달 동안 1만2000건이 넘는 신고와 상담을 통한 ‘미투’가 이뤄졌다. 변혜정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은 “미투 운동에 힘을 받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집단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변화는 진행 중이다. 정부는 쏟아져 나온 피해 고발자들에 대한 보호 정책을 만들고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범정부 차원의 성희롱·성폭력 근절추진 협의회가 만들어졌고 정부가 공공·민간부문 성폭력 예방 대책을 잇따라 내놨다. 실효성이 얼마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정부가 나설 주된 사회이슈로 부상한 것만은 틀림없다. 성폭력 피해자를 ‘꽃뱀’으로 의심하는 것 같은 ‘2차 가해’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드러낸 것도 성과다. 언론의 왜곡된 보도, 유명인들의 잘못된 발언은 그때그때 도마에 오른다. 경찰청은 성폭력 피해자가 가명으로 조서를 쓸 수 있게 하는 등 수사과정에서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현실적인 대책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경찰은 ‘남초집단’인 수사기관의 여성비율을 끌어올리는 작업도 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를 제대로 돕고 가해자를 처벌하려면 사법기관과 수사기관 내 여성비율을 끌어올려 조직 내 남성중심적 문화를 완화시키고 성인지 감수성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경찰청 성평등정책담당관실 관계자는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고려하는 것이 여성 경찰 비율을 높이는 것”이라면서 “경찰대학의 성별 통합 모집을 실시하고 경찰 조직의 최소 15%가 여성이 될 수 있도록 채용과 승진에서 차별을 개선하려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지난 1월 이후 2차 피해나 권력형 성폭력을 막기 위한 법률개정안 90여건이 쏟아졌다. 신보라 자유한국당 의원은 직장 내 성폭력이 일어나면 사업주가 즉시 조사하고 신고하며 가해자를 징계하도록 의무화하는 이른바 ‘직장 내 미투 방조 처벌법’을 발의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재판 결과가 확정될 때까지 성폭력 피해자를 명예훼손죄로 기소할 수 없도록 하는 일명 ‘미투 2차피해 방지법’을 내놨다. 

6·13 지방선거는 성평등 의제가 중심에 선 첫 선거가 될 수 있다. 비서를 성폭행했다는 의혹으로 물러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은 충청지역 선거의 핵폭탄이 됐고, 부산에서도 사상구청장 예비후보의 폭행과 성폭행 의혹이 판세를 흔들고 있다. 여러 후보들이 공약에 경쟁적으로 ‘성평등’ 가치를 넣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나서는 박원순 서울시장은 9가지 핵심 공약 중 하나로 ‘성평등 도시 서울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경기도지사에 도전하는 이재명 성남시장은 “실질적인 성평등 대한민국을 선도하는 경기도를 만들겠다”고 했고, 이용섭 민주당 광주시장 후보는 “성평등 1등 광주”를 약속했다. 정의당은 당 차원에서 여성안심도시, 여성 건강권 보장, 성평등 추진 기반 강화 등을 지방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4년 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 ‘동의 얻었느냐’ 가해자에게 물어야 

미투 운동이 남긴 가장 시급하고도 일차적인 과제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사법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미투 운동은 사법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성폭력’의 범주를 매우 좁게 규정해놓은 체제 안에서 피해를 구제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공론장으로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기준에 가장 많이 뒤처져 있고 전문가들이 개선돼야 할 것으로 첫손 꼽는 과제는 형법상 ‘강간’의 정의를 바로잡는 일이다. 현재 형사법체계에서 성폭행은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에 이르는’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폭력과 협박이 없으면 강간죄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피해자는 그런 폭력과 협박에 ‘저항’해야만 범죄 피해를 인정받는다. 지적장애가 있는 여성이나 미성년 여성이 피해를 당해도 ‘저항했는지’를 따지고, 죄를 입증하기 위해 수사기관에서 ‘왜 저항하지 못했느냐’라는 물음에 시달려야 하는 것은 이런 시스템 때문이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관은 “여성은 자라면서 성적으로 수동적인 사람이 되도록 요구를 받으며, 성관계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 ‘문란하다’는 프레임이 씌워진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화 속에서 여성의 ‘노(No)’는 ‘예스’라는 인식이 여전히 퍼져 있고 “(명시적으로) 여성이 동의하지 않았더라도 강간으로 인식되지 않는 성적 관행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허 조사관은 말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형법상 강간죄가 성립되는지 따질 때 폭행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피해자가 성관계에 ‘동의’했는지를 봐야 한다고 한국 정부에 권고한 상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도 “강간죄 수사에서 가해자가 성관계에 동의를 받았는지 확인해 가해자에게 입증의 책임을 넘겨야 위계·위력 아래에서 피해를 당한 이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꽃뱀’ 만드는 법체계 고쳐야 

전문가들은 한국의 성범죄 신고율을 대략 10% 수준으로 추정한다. 피해자 10명 중 9명은 신고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뜻이다. 장미혜 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성폭력을 뿌리 뽑으려면 ‘가해자는 처벌받는다’는 사회의 합의가 깔려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고율을 높이고 가해자들이 벌을 받게 하려면 성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의 ‘행실 탓’으로 돌리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원 ‘울림’ 선임연구원은 “미국과 영국 등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방패법’을 두고, 피해자가 과거에 성과 관련돼 어떤 이력이 있었는지 또는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재판 과정에서 묻지 못하도록 보호한다”고 소개했다. 

검찰이 고소고발 사건에서 무혐의 결정을 내리려면 고소·고발인에게 무고 혐의는 없는지 먼저 판단하게 돼 있다. 이 규정 때문에 수사가 끝나기도 전에 피해자가 ‘꽃뱀’이라는 의심을 받고 무고죄 피의자로 전환되는 경우가 있다. 이번 기회에 무고죄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적용 범위를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진실을 말했더라도 남의 명예를 실추한 것으로 인정되면 범죄가 되는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는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다. 가해자들은 흔히 보복성으로 혹은 피해자의 입을 막기 위해 피해자를 무고죄로 고소하곤 한다. 법무부는 무고죄 수사를 성폭력 사건 수사가 다 끝난 뒤에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피해자가 진술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서는 처벌을 면해주는 범위를 넓힐 예정이다. 민주당 정춘숙 의원은 이미 2016년 성폭력 사건 수사가 끝날 때까지 피해자가 무고죄로 수사받지 않게 하는 법안을 냈다. 

성폭력 범죄를 처벌해야 한다고 모두가 말하지만 법의 빈틈은 이밖에도 많다. 타인의 나체 사진이나 성관계 영상을 찍고 유포하는 행위는 현행법에서 명예훼손이나 단순 음란물 유포죄만 적용된다. 유나겸 서울경찰청 사이버성폭력전담팀장은 “현행 성폭력 관련법으로는 나체 합성 사진 같은 신종 사이버 성폭력 대부분을 처벌할 수 없어 수사현장의 답답함이 크다”고 말했다.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사업주를 통해서만 제재할 수 있는 성희롱도 형사처벌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성범죄 예방과 대응을 관리감독하는 기관도 흩어져 있다. 비슷한 성폭력이라 해도 공공기관에서 벌어지면 여성가족부, 민간 사업장이면 고용노동부, 대학과 초·중·고 등 학교는 교육부 등이 담당한다. 장미혜 연구원은 “성폭력 대응이 부처별로 제각각 이뤄지다 보니 사각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다. 개별창작자 위주인 문화예술계, 정부 컨트롤타워 바깥에 있는 의료계 등은 거의 방치돼 있다. 이런 분야에서 미투 운동이 일어나도 폭로 이후 해결책이 없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된 비정상적인 조직문화 자체가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대학에서는 교수에게, 국회에서는 의원에게, 회사에서는 사장에게 집중된 ‘위력’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예컨대 이윤택 같은 권력자에게 기대지 않으면 그 분야에서 성취를 이룰 수 없는, 성공한 소수에게 권력이 편중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 교육에서부터 ‘평등’을 

미투혁명은 성폭력과 성차별 대책을 내놓으라는 요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 밑에 깔린 ‘강간문화’를 성찰해보고 일상의 성차별을 개선하고 평등한 사회규범을 만들자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사회 전반을 개혁하는 것이 단기간에 될 수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세밀한 제도적 대책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야동’과 음담패설로 성을 배우는 현실, 일상적인 성매매와 성접대, 여성을 소수자로 만드는 일자리 구조를 개선해 나가지 않으면 평등한 미래는 오지 않는다.

학교에서부터 성평등과 인권을 가르쳐야 한다는 목소리는 이미 공감대를 얻고 있다. 초·중·고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해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21만명의 추천을 받았고, 청와대는 지난 2월 “통합적인 성평등·인권교육을 추진하겠다”고 화답했다. 장미혜 연구원은 “사회구조적으로 폭력적인 관행 속에서 자라온 이들은 타인에게 의사를 관철시킬 때 폭력을 개입시키는 것에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된다. 특히 성폭력 밑에는 ‘남자의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며 “폭력을 용인하고 성폭력을 ‘관행’으로 여기게 만드는 의식구조는 교육으로 바꿔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스웨덴의 경우 1985년부터 교육법에 ‘모든 학교는 성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했고 학생들이 성별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지 않도록 하는 데 애쓰고 있다. 교과서에도 성평등 요소를 반영하고, 남녀가 체육을 비롯해 모든 활동을 같이한다. 

호주는 유치원에서부터 12학년까지 성희롱과 성차별의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과정을 만들어 가르친다. 운동과 놀이공간이 남학생들의 전유물로 여겨지지 않게 하려고 적절한 놀이공간과 시설을 개발하기도 했다. 

■ 차별, 법과 제도로 막아야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지금의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종류의 성차별과 성별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교육을 전 국민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 생애에 걸쳐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동화나 영화, 만화처럼 대중적인 플랫폼을 활용해 성평등 교육을 하는 범정부 차원의 정책구상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미혜 연구원은 “정규교육과 시민교육 양쪽에서 폭력을 민감하게 인식하게 하는 ‘폭력 감수성’ 교육이 자리 잡게 하고, 모두가 1년에 한두 시간만이라도 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틀을 짜면 그것만으로도 특히 젊은 사람들은 쉽게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매매와 성접대 관행은 직장 내 성폭력에 무감각해지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지만 제대로 공론화된 적이 없다. ‘접대문화’는 남성들만의 네트워크가 되고,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배제하게 만든다. 여성을 사회의 동등한 일원이자 직장 동료가 아니라 상품화하거나 빼놓아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정재원 국민대 교수는 “남성중심 조직의 뿌리 깊은 성매매 문화는 ‘여성의 성은 쉽게 살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퍼뜨리고, 여성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존중할 줄 모르는 ‘불완전한 남성 시민’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성폭력 가해자들을 욕하는 ‘보통’ 남성들도 성매매와 성접대는 무용담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남성 권력’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숫자’가 늘고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 기본 전제다. 조직 내 여성 비율을 제도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라고들 한다. 이미 남성중심으로 짜여진 판에서 여성에게 ‘자력으로’ 파이를 늘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거짓 공정성’일 뿐이다. 그래서 여성할당 같은 보완책들이 거론된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들이 요구한 지역구 30% 여성 후보 할당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여성을 공천하라고 말하면 ‘남자들이 얼마나 정당에 헌신했는지 아느냐, 그 지역에 대해 뭘 아느냐’는 반발부터 나온다”고 했다.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통로 자체에서 남성과 여성이 다른 측면도 있다. 남성들은 자기들끼리의 네트워크, 즉 ‘인맥’을 통해 정치활동을 시작하고 경력을 쌓는 길이 만들어져 있다. 반면 여성들은 일상의 문제를 계기로 시민사회에서 활동하거나 전문영역에서 커리어를 쌓아 정치를 시작한다. 이 대표는 이렇게 남성과 여성의 ‘문법’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적극적인 우대조치 없이 자연스레 성비가 맞춰지길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차별금지법처럼 적극적으로 차별을 막는 법을 만들고, ‘무엇이 차별인지’를 시민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하는 일이다. 점점 강도가 심해지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을 규제할 확실한 방안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세 차례 발의됐지만 보수 기독교계 등의 반발로 좌절됐다. 무산된 법안에는 성별을 이유로 고용이나 직업훈련에서 차별하지 못하게 하고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교육내용 등에 넣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배복주 한국성폭력상담소 상임대표는 “폭력에 앞서서 일어나는 ‘차별’을 막는 법안과 정책이 먼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혜·남지원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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